어떻게 천하를 통일 할 수 있었나, 진(秦)나라 이야기.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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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USDT티비 작성일 26-06-21 20:06 조회 117 댓글 1본문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만든 강대국 진나라
그 시작은 미약하고 초라했습니다.

진나라의 시조는 "백익"이라고 전합니다.
전설 속에 나오는 우임금의 신하로 치수에 공을 세워
우임금 다음으로 하나라 군주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런 백익이 우임금에게 성을 받았으니
영(嬴)성을 창시했습니다.
일단 하나라 자체가 후대에 창작한 신화에 불과하니
아마도 역시 후대에 짜집기로 만든 신화겠죠
세월이 흘러 후손 중에 "비자"라는 인물이 나왔고
주나라 왕의 충직한 신하로 말과 양을 잘 길렀기 때문에
그 공로를 인정 받아 진(秦)땅에 봉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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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백예(伯翳)가 순임금을 위하여 가축을 관리하여 잘 번식시켜서 땅을 하사받고 영씨 성을 받았다.
지금 그 후손들이 짐을 위해 말을 번식시켰기에 짐이 땅을 나누어주어 속국(屬國)으로 삼고자 한다.”
-사기 진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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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에게 최초로 받은 씨족 땅이 진(秦) 입니다
때문에 성씨를 합쳐 진영(秦嬴)이라 부르기도합니다
말과 양을 잘 길렀다...왠지 유목민의 냄새가 나죠
유목민인 서융의 한 갈래 씨족이 아니었나 추정합니다
서융족 일파 중에 주나라에 협력해 복속된 씨족이 있었고
이들이 농경을 배우며 주나라 서쪽 변경에 정착한 것이죠

(진나라 초기 수도 대견구 지역)
섬서성 관중 지역은 유목민족들과 접하는 변경인 동시에
농업이 매우 발전한 비옥한 지역입니다
춘추 시대에는 기온이 약 3도 정도 더 높았음으로
지금 보다 기후와 환경이 훨씬 좋았습니다.
처음 도읍한 진읍(秦邑)도 이런 접경지에 위치한
반농 반유의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진나라는 이 지역에서 유목민인 서융과 싸우며
오랜 투쟁 끝에 농경민으로 정착에 성공한 부족입니다.


진(秦)의 갑골문의 글자를 분석해 보면
가운데 곡식 절구 공이를 둘러싸고
여러사람이 함께 빻는 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秦)은 농경과 연관된 글자입니다.
초기 진나라의 성격이 반농 반유의 씨족집단임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진나라는 주나라의 부용국으로
관중 지역의 서쪽 변경을 지켰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진나라는 진읍에 봉해진 백작으로
역대 진나라의 제후들은 하나 같이
모두 서융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나옵니다
진 제후가 서융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 아들 ** 이 진나라 작위를 이었다
진 제후가 다시 서융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 아들 ** 이 진 나라 작위를 이었다
죄다 이런식으로 계보가 이어지죠
서주의 마지막 임금 유왕 때 수도 호경이 서융에게 털리고
천자인 주나라가 동쪽 낙양으로 천도하게 되니
관중 지역의 넓은 땅을 모두 진나라에게 버리듯 줘버립니다
그동안 진나라 계보에 반복적으로 나온
서융과의 전쟁 그리고 수 많은 진 제후의 죽음들은
이런 관중 지역 땅을 봉작 받은 서사를 위한
일종의 정당화 명분 기록일 수도 있고
실제로 진나라가 서융과 극심하게 투쟁하며
변방을 지키고 성장한 기록일 수도 있습니다

(진나라 수도는 서쪽 변경의 진땅에서 대견구, 평양, 옹(雍) 땅, 경양, 역양, 함양으로 점차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렇게 춘추시대 진(秦)나라가 역사에 등장하였습니다
춘추시대 진나라는 진 목공이라는 걸출한 군주가 출현하며
나름 춘추 5패의 한 축으로 거론되기도 하였지만
변방의 작은 나라라는 지역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원 국가들에게는 작위도 낮은 오랑캐 국가 정도로 여기며
다소 무시와 멸시를 받는 나라였습니다


(드라마 "대진제국"에 나온 진나라 군대 모습, 변법 이전 가난한 진나라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나라였고 후진적인 상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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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백성들은 토굴 속에서 살며, 한방에 여러 식구가 섞여 지냅니다."
(秦民之生處 窟穴居,男女雜處)
"남자와 여자가 거처를 구분하지 않아 오랑캐나 짐승과 같은 풍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父子兄弟同室而居,男女之別,如夷狄禽)
- 사기 상군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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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진나라는 국가 사회 구조도 매우 단순했습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닌 동생들이 이어 받았고
중원 국가들처럼 각종 관직과 계급이 많은 것이 아니라
국군(國君), 서장(庶長), 백성의 3등급이 있었을뿐입니다
국군은 왕이고 서장은 백성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니
군주를 중심으로 각 씨족 우두머리들이 충성하는 형태죠
일종의 씨족, 부족 연맹체 단계였다는 뜻입니다.
이런 진나라를 개혁하고 바꾼 것이 "상앙" 입니다.

위나라 출신의 법가 사상가 상앙은 진나라로 와서 등용이 되었고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워낙 많은 이야기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나무를 옮겨 신뢰를 얻었다는 이목지신(移木之信) 일화로 유명하죠
상앙이 진나라에서 와서 도성 남문에 3장(약 9m)의 나무를 세우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10금의 상을 내리겠다 방을 붙였습니다
간단한 일에 나라에서 그리 큰 상금을 준다는 말을 하니 믿겨지지 않죠
진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고 이번에는 상금을 50금으로 올렸습니다
어느날 한 사람이 이를 옮기자 상앙은 약속대로 상금을 모두 주었습니다.
상앙은 "국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 라는 것을 그렇게 각인 시켰습니다. .
법가 사상을 백성들에게 직관적으로 가르친 기록입니다.
상앙은 변법 개혁을 통하여 법치를 진나라에 도입하였고
각종 법률을 제정하고 부국강병책을 입안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그가 한 진짜 중요한 개혁은 씨족사회의 완전 해체입니다

앞서 진나라 백성들은 동굴을 파고 들어가
집단적으로 남녀가 섞여 토굴에 살았다고 했습니다
관중 지역의 전통 가옥인 야오동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지금도 전해지는 전통 건축 방식입니다
목재가 부족한 지역에서 나름 효율적으로 건축한 것이죠
중국 남부 지역에서 토루 형태의 집단 거주 가옥이 있었듯
야오동 역시 씨족 중심의 집단 거주지였습니다.
당시 진나라 백성들은 씨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씨족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문중의 개념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문중은 한 가족이고 토지도 문중 땅으로 공동 소유하죠
춘추시대까지 씨족 집단별로 집단 거주를 하는 것이
고대 가장 기본적인 가족의 형태이자 생활이였다면
당시 상앙은 변법을 통해 이런 씨족단위를 해체하고
강제로 개인 단위로 가족을 분할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일단 이것이 가능하려면 조건이 충독되야 합니다
철기시대가 도래하며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여
씨족 단위의 농경이 아닌 소가구 단위 농경이 가능해야 하고
토지의 소유 역시 씨족 단위의 집단 적인 토지 소유가 아닌
가구 단위로 개인적인 토지 소유가 가능해야 합니다.
이미 전국시대를 거치며 철기가 보급되었고
우경에 의한 농사법이 보편화되며 가능해졌죠
상앙은 각 호구에 남성이 2인 이상이 있으면
반드시 분가하여 새로운 가정을 차리도록 했으며
이를 준수 안하면 세금을 2배 더 가중 징수하였습니다.
강제적으로 씨족의 해체와 분화를 유도한 것입니다.
더불어 진나라에서는 노예의 소유를 금지하고
노예들 조차 호구에 편입해 모두 양민화 시킵니다.
이렇게 변화하여 바뀌어진 진나라의 통치 체제를
중국사에서 제민지배 체제라 합니다

행정 시스템의 개념이 없던 고대 봉건 국가에서는
각 지역을 씨족단위 수장에게 위임하여 통치하였고
군주는 그 씨족들을 통해 백성을 간접 지배를 하였습니다.
이제 이런 봉건적인 통치 방식을 개혁해서
국왕 즉 국가가 모든 백성을 직접 통치하는 방식으로
모든 백성을 국가의 행정 시스템에 포함시킨 개념입니다
전국시대 나타나는 "변법 개혁"의 실체가 이것입니다

전국시대 말기 각 지역에서 나타난 변법 운동들은
주로 법가 사상가를 통해 기존의 봉건 질서를 부수고
왕이 모든 백성의 호구를 통제하는 방향으로
국가와 사회의 지배질서를 개편해 나갔습니다.
이를 성공한 국가는 대량의 징병과 세수 확보가 가능했죠
영역국가로 변모한 국가들의 행정 시스템을
국가 단위 전쟁에 맞게 새로 개편한 것으로
전국 시대 부국강병은 보통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당시 중국 문명에서 나타난 일대 변혁이었고
이런 변화는 그 등장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세계사 모든 문명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한국사에서는 율령반포와 중앙집권화라고
보통 교과서에서 배우고 있죠
국가 시스템에 포함이 된 백성들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기준이 되는 "법"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것입니다
과거 지배계급이 피지배민을 통제하는 방법은
오직 마주하는 봉건 영주들의 직관적인 폭력에 한정 되었다면
이제 법가 이론을 통해서 폭력을 시스템화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국가는 안정적인 제민지배를 달성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앙은 "십오제"라고 진나라 백성들을 5가구 10가구 단위로 묶어
연좌제를 적용하였고 상호 감시와 통제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단위는 곧 국가에서 징병과 세금을 걷는 기준입니다.
이 제도는 명나라에서 이갑제, 조선에서는 오가작통법
에도 막부에서는 오인조, 조선총독부의 애국반 제도처럼
동아시아 특유의 통제 방식으로 근대까지 활용된 제도입니다
심지어 그 흔적인 통장이란 직위는 지금도 남아있죠
상앙의 변법으로 백성을 직접 통제하는데 성공하면서
과거 봉건 영주들의 사병으로 병력을 충당하는게 아닌
국가 차원에서 바로 백성을 병력으로 징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진나라를 본격적인 전쟁국가로 변모 시켰습니다.

진나라의 5명 단위의 백성 통제는 군대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5명을 하나의 단위로 오(伍)라고 하였고 오장(伍長)을 임명 했습니다
그리고 5명 단위로 군공을 세우게 함은 물론 벌도 같이 받았죠
1명이 탈영하면 같은조 나머지 4명은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또한 상앙은 진나라에서 모든 공적의 기준을 귀족, 백성 상관없이
오직 군공으로 공평하게 따지도록 법으로 정했습니다.
이를 군공수작제라고 합니다.
백성들에게도 작위를 주면서 총 20등급으로 나누어
적의 목을 베어오면 그에 따른 등급과 토지 포상을 했습니다
수급(首及), 수급을 취하다 등의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모든 진나라 백성들은 56세까지 이런 군역에 종사해야 했고
군에서 전공을 세웠는가의 여부에 따라 지위와 토지가 달라졌기에
국가와 사회 전체가 전쟁을 군공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죠
상앙의 변법으로 진나라는 군사강국이 됩니다
진나라에서 제민지배 체제가 본격적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은
군사 징병에도 유용했지만 노동력 징발도 수월하단 뜻입니다
진나라는 인력을 동원해 대규모 관개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현재 사천성에 있는 이빙 부자 동상)
진나라가 군사력으로 초나라를 한중에서 밀어내면서
관중에서 촉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파, 촉 지방은 모두 진나라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진나라 소양왕 시절 촉군 태수 이빙은
촉땅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만성적인 홍수를 해결하고자
대규모 치수사업을 단행하였으니 "도강언"입니다
수로를 만들어 부채 꼴로 물길을 조절한 것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관개 수로 유적입니다.
완성되자 촉땅의 농업 생산력은 극적으로 변화했습니다.
관개 토지가 1만 경(약 2만 4326헥타르) 새로 추가되었고
기존의 농경지 역시 홍수 피해없이 용수 공급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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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가물어도 사람들이 굶주림을 알지 못했고, 흉년이 없어 천하가 일컫기를 하늘의 곳간이라 한다.
(水旱從人, 不知饑饉. 時無荒年, 天下謂之天府)
-화양국지, 촉지
중국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다.
(中国历史上最激动人心的工程不是长城 而是都江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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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관개 사업의 결과로
사천성의 광활한 평야는 모두 곡창지대로 변모하였고
촉땅 백성들의 삶과 생활수준도 크게 향상 되었습니다.
사천성의 주민들은 지금도 이빙의 업적을 찬양하는 중입니다.
훗날 제갈량이 입촉한 후에도 가장 신경 쓰며 관리한 것도
바로 이때 만들어진 진나라의 도강언 관개 시설입니다.
제갈량은 아예 책임 담당자를 임명해 체계적으로 운용하였죠
여기서 나온 곡식에 의지해 제갈량은 북벌을 단행했습니다.

관중 지역의 농경지가 본격 개발되어
농업 생산력이 극대화 된 시기도 진나라 시기입니다
정국거는 중국 3대 수리시설 중에 하나로
무려 13만 헥타르에 달하는 관개 면적을 가진
고대 세계 최대 규모의 관개 수로 시설입니다
진나라가 관중 지역에 흐르는 위수와 경수를 정비하여
건조한 지역에도 용수 공급이 가능하게 만듬에 따라
엄청난 농업 생산력을 가진 지역으로 변모합니다
덕분에 관중은 엄청난 인구 부양력을 가진 지역이 되었고
이후 1천년 간 중국문명 제국의 수도로 중심지역이 됩니다
앞서 도강언 수리 사업을 한 인물이
촉군 태수 이빙이라 하였죠
어라? 제후가 아니라 태수네요? 군?

전국시대 말에 이르면 진나라에서
오늘날 익숙한 군현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진나라는 새롭게 정복한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습니다
기존 봉건 국가였다면 왕의 인척이나 공신에게
해당 정복 영토를 나눠 제후로 분봉해 주었겠지만
이렇게 되면 해당 지역의 백성들은 왕이 아니라
분봉 받은 제후를 주인으로 여기며 복종하게 됩니다.
전국시대 제후가 군주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던
삼진의 분열과 제나라 전씨의 찬탈 같은 하극상도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발생하였죠
진나라는 변법으로 완벽한 제민지배를 달성했기에
그런 불완전한 지역 통치를 할 필요가 없게됩니다
직접 지배를 하였고 태수를 파견하는 군현제를 시행했습니다.
과거 통치하던 지역에는 여전히 씨족 공동체 형태인
귀족들의 영지가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그 수취 방식을 바꾸면서 변모시켜 나갑니다
식읍(食邑) 이라는 형태로 어떤 지역을 분봉한다고 하여도
세금의 수취권만 부여할 뿐이지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았죠
비슷한 것을 한국사 과전법 파트에서도 보았죠
양반 관료들의 안정을 위해 처음에는 토지를 그대로 주었지만
이것이 수조권으로 세금만 걷어가는 간접 소유 형태로 바뀌고
나중에 되면 땅과 아예 관련 없는 녹봉으로 대체됩니다.
식읍제도는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변화하는 과도기로
왕이 아닌 다른 지방 권력으로 부터
토지와 백성을 분리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궁극적으로 국가가 모든 호구를 중앙에서 통제한다는 것이고
이는 관료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전국 단위 행정을 운용해야 하며
철저한 중앙 집권 시스템이 수립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참고로 법률의 내용과 지방 행정은 이를 시행한 문서가 현존합니다
진나라 시절의 행정 문서인 죽간이 아예 발견되었죠
"수호지 진간"과 "리야 진간"을 통해 실체가 확인 되는 내용입니다.
문명사에서 이 단계에 이르는 과정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무려 근대까지도 봉건제를 유지한 국가들이 수두룩하죠
진나라는 법을 통해 이것을 달성한 것입니다.

이런 과도기를 거치며 완성한 진나라의 군현제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며 전국에 본격 적용 되었고
이후 중국의 모든 왕조와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군현제 행정 시스템을 도입하였습니다
이렇게 행정을 체계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단 것은
전쟁도 국가 단위로 체계화 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진나라의 강한 군사력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진나라는 군대의 모든 무기를 표준화 하였습니다.
검과 창, 화살은 모두 주물로 대량 제작을하며
같은 품질의 동일한 규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때문에 전투시 임기응변으로 쉽게 교체할 수 있었죠
병사의 무장은 각자 개인의 사비로 한 것이 아니라
모두 국가에서 지급하였고 또 차등 지급했습니다
무기 지급도 군공수작제를 똑같이 적용하였기 때문에
병사가 전쟁에 나가 공을 세웠을 경우 승진하여
더욱 좋은 병종, 좋은 무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는 그날까지도
주력 무기를 철기가 아닌 청동으로 만들었습니다.
초기 철기 무기는 탄소강이 아니었고 조악했기 때문에
잘 만들어진 청동보다 그 질이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청동은 그 재료가 비싸고 재련이 쉬운 금속이 아닙니다
청검의 경우 대부분 단검으로만 발견이 되는 이유도
청동 검은 휠 수가 있어 길게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죠
하지만 진나라의 청동검은 90센티가 넘습니다
진나라는 가장 이상적인 금속 배합법을 통해 보완했습니다
무기 제작 역시 군공수작제를 통해 그 책임을 물었고
철저하게 상벌을 주면서 국가에서 관리했기 때문이죠
국가에서 모든 병종의 무기를 표준화하여 대량 제작했고
해당 무기들은 전부 4등급으로 나뉘어진 장인들이
각자의 이름을 새겨서 품질을 보증하게 했습니다.


전국시대 영역국가로 성장한 거대 왕국들이
수 백년에 걸쳐서 전쟁하고 싸운 결과
보다 효율적으로 전쟁을 하기위한 병가 사상과
보다 효율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법가 사상같은
다양한 사상적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상앙과 같이 법가와 병가를 모두 학습한 인물이 등장해
아예 국가 전체를 전쟁 국가로 바꾸는 개혁도 이루게 되죠
고대 도시 국가들 간에 투쟁을 지속했던 그리스에서도
스파르타와 같은 전쟁 국가가 탄생하기도 했지만
중국 문명에서 탄생한 전쟁국가는 스케일이 달랐습니다
도시 국가가 아닌 영역 국가 단위였죠
또한 당시 진나라와 비슷하게 변법을 시도한
대부분 중원 국가들의 경우 이미 발전된 문명 상태로
기존의 귀족 기득권과 씨족들 저항이 워낙 강했기에
급진적인 개혁은 매번 저항을 받아 실패를 하였습니다
진나라의 상앙도 변법 개혁으로 큰 원한을 샀고
이후 귀족 기득권들의 복수로 목숨을 잃게 되었죠
하지만 진나라의 경우는 변방의 거지 국가로
상대적으로 기득권 저항의 강도가 크지 않았기에
상앙의 죽음 이후에도 그 유용성을 확인한 군주가
법가를 계속 존중하며 개혁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법가들은 진나라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마치 백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듯
법가사상으로 만든 국가설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변법 개혁의 성공 + 제민지배 확립 + 농업 생산 증가
+ 전 국민의 징병을 통한 총력전 체제 + 전쟁 중심의 사회
국가를 중심으로 나라 전체가 거대한 공장이 되어
백성, 행정, 군대, 생산이 유기적으로 함께 돌아가는
오직 부국강병과 전쟁에 모든 국력을 몰빵한
전국시대 전쟁에 최적화된 전쟁국가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나라입니다.
그 결과










진나라는 31대 군주 영정 시대에 이르러
수백년 간 싸워 온 전국시대 6국을 모두 멸망시키고
결국 천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중국 문명사 최초의 통일제국이 출현하였으니
진나라 군주는 이제 통일 진 제국의 초대 황제
진시황이라 부르게 됩니다.
끝.
이전 왕조 이야기.
중국역사 최초의 왕조 상나라 이야기.
https://www.usdtv.net/699668019
공자가 꿈꾸던 이상국가 주나라 이야기.
https://www.usdtv.net/700726155
난세의 시작, 춘추시대 이야기.
https://www.usdtv.net/701772246
동아시아 문명의 탄생. 전국 시대 이야기.
https://www.usdtv.net/703505005
통일 제국은 왜 15년 만에 멸망했는가, 진(秦)나라 이야기. 하편)
https://www.usdtv.net/708992759











소송의프리렌님의 댓글
소송의프리렌 작성일머리에 쏙쏙 들어오네